도리타니 다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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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리타니 다카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유격수, 3루수, 2루수 등 내야 수비와 타격을 겸했다. 세이보가쿠엔 고등학교,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2003년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하여 2019년까지 활약했으며, 2020년부터 2021년까지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2013년에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로 출전했다. 통산 6번의 베스트 나인, 4번의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으며, 2017년에는 2000안타를 달성했다. 은퇴 후에는 야구 평론가 및 해설가로 활동하며, 사회 공헌 활동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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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타니 다카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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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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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81년 6월 26일 |
출생지 | 도쿄도히가시무라야마시 |
포지션 | 유격수 |
타격 | 좌타 |
투구 | 우투 |
선수 경력 | |
데뷔 리그 | NPB |
데뷔일 | 2004년 4월 2일 |
데뷔팀 | 한신 타이거스 |
최종 리그 | NPB |
최종 경기일 | 2021년 6월 6일 |
최종팀 | 지바 롯데 마린스 |
선수 | 한신 타이거스 (2004년 ~ 2019년) 지바 롯데 마린스 (2020년 ~ 2021년) |
지도자 경력 | |
코치 | 파나소닉 |
통계 (2021 시즌 NPB 기준) | |
타율 | 0.278 |
안타 | 2,099 |
홈런 | 138 |
타점 | 830 |
희생타 | 54 |
도루 | 131 |
수상 경력 | |
베스트 나인 | 6회 (2008년, 2010년 ~ 2011년, 2013년 ~ 2015년) |
NPB 올스타 | 7회 (2005년 ~ 2006년, 2012년 ~ 2015년, 2017년) |
골든 글러브 | 5회 (2010년, 2013년 ~ 2015년, 2017년) |
기타 정보 | |
고등학교 | 세이보가쿠엔 고등학교 |
대학교 | 와세다 대학 |
드래프트 연도 | 2003년 |
드래프트 순위 | 자유 획득 범위 |
대표팀 | 일본 |
WBC | 2013년 |
해설 및 평론가 | 마이니치 방송 야구 해설가 (2022년 ~) 닛칸스포츠 야구 평론가 (2022년 ~) |
등번호 | 81 (코치) |
2. 프로 입단 전
도쿄도 히가시무라야마시 출신인 도리타니 다카시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여러 야구 클럽에서 활동했다. 사이타마현에 위치한 세이보가쿠엔 고등학교 3학년 때 유격수 겸 투수로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으나, 오이타현 대표인 히타시의 히타 린코 고등학교와의 첫 경기에서 구원 투수로 등판하여 143km/h의 구속을 기록했지만 팀은 패배했다.[203] 와세다 대학에 진학하여 유격수로 활약하며 도쿄 6대학 야구 연맹에서 고토 다케토시와 함께 리그 역사상 가장 빠른 타이 기록인 2학년 봄 대회 3관왕을 달성했고, 4학년 봄에는 당시 리그 기록인 19개의 사사구를 기록했다. 4학년 가을에는 통산 두 번째 수위타자를 차지하여 베스트 나인에 다섯 차례 선정되었으며, 팀의 리그 4연패에 기여했다.[203] 대학 졸업 후, 2003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에서 자유 획득범위로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했다.
2. 1. 유소년 시절
도쿄도 히가시무라야마시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야구 외에 유도도 병행했다. 원래 왼손잡이였으나 오른손잡이로 교정되었고, 초등학교 시절 감독의 권유로 좌타자로 전향했다.[203] 하무라 제1 중학교 시절에는 니시토쿄 지역 명문인 미즈호 시니어 팀에 소속되었다.2. 2. 세이보가쿠엔 고등학교 시절
도쿄도 히가시무라야마시 출신인 도리타니 다카시는 사이타마현에 위치한 세이보가쿠엔 고등학교 3학년 여름, 유격수 겸 투수로 제81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203] 오이타현 대표인 히타시의 히타 린코 고등학교와의 첫 경기에서 구원 투수로 등판하여 143km/h의 구속을 기록했지만, 팀은 5-3으로 패했다.[203]2. 3. 와세다 대학 시절
와세다 대학 인간과학부에 진학하여 유격수로 활약하며 고토 다케토시와 함께 도쿄 6대학 야구 연맹 역사상 가장 빠른 타이 기록인 2학년 봄 대회 3관왕을 달성했고,[203] 4학년 봄에는 당시 리그 기록인 19개의 사사구를 기록했다.[203] 4학년 가을에는 통산 두 번째 수위타자를 차지하여 베스트 나인에 다섯 차례 선정되었다. 주로 3번 타자로 뛰면서 대학 동기인 아오키 노리치카, 히가 도시미쓰, 요시다 신타로 등과 함께 팀의 중심 선수로 활약하며 리그 4연패 달성에 기여했다.[203] 대학 통산 96경기에 출전하여 345타수 115안타, 타율 3할 3푼 3리, 11홈런, 71타점을 기록했고, 졸업 논문은 ‘타격 동작에 있어서의 하지의 근전도 해석’(打撃動作における下肢の筋電図解析일본어)이라는 제목으로 작성했다.[203]도리타니는 와세다 대학에서 인간과학을 전공했다. 그의 동기로는 아오키 노리치카(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히가 도시미쓰(히로시마 도요 카프), 요시다 신타로(오릭스 버팔로스)가 있었고, 이들 모두 훗날 프로 야구 선수로 활동한다.[1][2] 와다 쓰요시(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는 1년 선배였고, 다나카 히로야스(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와 다케우치 신이치(스왈로스)는 각각 1년, 2년 후배였다.
2001년 봄, 2학년이었던 도리타니는 도쿄 6대학 야구 리그에서 타율, 홈런, 타점 3개 부문 모두 1위를 차지하며 고토 타케토시와 함께 리그 역사상 가장 빠른 학년으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2003년 봄에는 19개의 볼넷과 몸에 맞는 볼을 기록하며 도쿄 6대학 기록을 세웠다(2004년 릿쿄 대학의 다바타 유이치가 경신). 같은 해 가을에는 두 번째 타격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와세다 대학에서 8시즌(봄, 가을) 동안 5번의 도쿄 6대학 베스트 9상을 수상했으며, 96경기에 출전하여 통산 타율 .333, 11홈런, 71타점을 기록했다. 아오키, 히가, 요시다 등과 함께 와세다 대학의 4연속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3. 프로 선수 시절
2004년 도리타니는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신인 시절, 후지모토 아쓰시와의 경쟁 속에서 개막전에 7번 타자 겸 유격수로 선발 출전하여 4월 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첫 안타를 기록했다.[7] 그러나 이후 5경기 만에 선발에서 제외되었고, 6경기부터는 후지모토에게 유격수 자리를 내주었다.[7] 주로 대타나 3루수로 출전하며 시즌 전반기에는 부진했지만, 5월 27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를 상대로 첫 홈런, 7월 19일에는 첫 도루를 기록했다.[7] 아테네 올림픽에 후지모토가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발탁되면서 생긴 공백기와, 후지모토가 부진했던 9월 중순부터 시즌 종료까지 도리타니는 다시 유격수로 선발 출전 기회를 얻었다. 시즌 후반에는 타율 2할 9푼 1리를 기록하며 회복세를 보였고, 프로 1년 차 최종 성적은 타율 2할 5푼 1리, 3홈런, 17타점이었다.[7]
2005년에는 후지모토가 2루수로 전향하면서 주전 유격수로 전 경기(146경기)에 출전했다.[18] 타율 2할 7푼 8리, 9홈런, 52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2개의 끝내기 홈런을 치기도 했다.[8][9][10] 시즌 후, 고등학교 선배이자 야구부 매니저였던 여성과 결혼했다.[11]
2006년에는 주로 6~7번 타순을 오가며 유격수로서 전 경기(146경기)에 출전했다. 타율 2할 8푼 9리, 15홈런, 58타점을 기록했지만, 수비에서는 21개의 실책으로 리그 1위를 기록했다.[12] 9월에는 아내가 첫 아이(아들)를 출산했다.
2007년에는 아카호시 노리히로를 대신하여 주로 1번 타자로 출전했지만, 타율 2할 7푼 3리, 10홈런으로 타격 성적이 다소 침체되었다. 7월 24일 주니치 드래곤스와의 경기에서 340경기 연속 이닝 출전이라는 NPB 신기록을 세웠고, 이 기록을 398경기까지 연장했다. 9월에는 여성 문제로 구단으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2008년에는 주로 6번 타자로 출전하여 타율 2할 8푼 1리, 13홈런, 개인 최고 80타점을 기록하며[13][14] 생애 첫 베스트 나인 상을 수상했다.[15] 9월 13일에는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2009년에는 마유미 아키노부 감독에 의해 3번 타자로 지정되어 타율 2할 8푼 8리, 20홈런, 75타점을 기록했다.
2010년부터 2019년까지의 기록은 아래 표와 같다.
2014년에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 진출을 선언했지만, 결국 한신 타이거스와 재계약했다.[16]
2019년 12월 2일,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17]
도리타니는 뛰어난 수비 범위와 강한 어깨를 바탕으로 유격수 포지션에서 활약했지만, 송구 실책이 잦은 편이었다.[22] 2008 시즌에는 15개의 실책으로 센트럴 리그 유격수 중 최다 실책을 기록했다.
NPB(Nippon Professional Baseball) | |||||||||||||||||
---|---|---|---|---|---|---|---|---|---|---|---|---|---|---|---|---|---|
연도 | 나이 | 팀 | G | AB | R | H | 2B | 3B | HR | TB | RBI | SB | AVG | OBP | SLG | OPS | |
2004 | 22 | 한신 | 101 | 235 | 28 | 59 | 13 | 0 | 3 | 81 | 17 | 2 | .251 | .320 | .345 | .665 | |
2005 | 23 | 146 | 572 | 82 | 159 | 27 | 1 | 9 | 215 | 52 | 5 | .278 | .343 | .376 | .719 | ||
2006 | 24 | 146 | 543 | 65 | 157 | 28 | 2 | 15 | 234 | 58 | 5 | .289 | .362 | .431 | .793 | ||
2007 | 25 | 144 | 565 | 67 | 154 | 19 | 4 | 10 | 211 | 43 | 7 | .273 | .350 | .373 | .724 | ||
2008 | 26 | 144 | 523 | 66 | 147 | 17 | 6 | 13 | 215 | 80 | 4 | .281 | .365 | .411 | .776 | ||
2009 | 27 | 144 | 538 | 84 | 155 | 31 | 2 | 20 | 250 | 75 | 7 | .288 | .368 | .465 | .819 | ||
2010 | 28 | 144 | 575 | 98 | 173 | 31 | 6 | 19 | 273 | 104 | 13 | .301 | .373 | .475 | .848 | ||
2011 | 29 | 144 | 500 | 71 | 150 | 28 | 7 | 5 | 207 | 51 | 16 | .300 | .395 | .414 | .809 | ||
2012 | 30 | 144 | 515 | 62 | 135 | 22 | 6 | 8 | 193 | 59 | 15 | .262 | .373 | .375 | .748 | ||
2013 | 31 | 144 | 532 | 74 | 150 | 30 | 4 | 10 | 218 | 65 | 15 | .282 | .402 | .410 | .812 | ||
2014 | 32 | 144 | 550 | 96 | 172 | 28 | 2 | 8 | 228 | 73 | 10 | .313 | .406 | .415 | .820 | ||
2015 | 33 | 143 | 551 | 69 | 155 | 21 | 4 | 6 | 202 | 42 | 9 | .281 | .380 | .367 | .747 | ||
2016 | 34 | 143 | 449 | 49 | 106 | 16 | 1 | 7 | 145 | 36 | 13 | .236 | .344 | .323 | .667 | ||
2017 | 35 | 143 | 488 | 57 | 143 | 23 | 3 | 4 | 184 | 41 | 8 | .293 | .390 | .377 | .767 | ||
2018 | 36 | 121 | 220 | 15 | 51 | 11 | 0 | 1 | 65 | 22 | 1 | .232 | .333 | .295 | .629 | ||
2019 | 37 | 74 | 92 | 9 | 19 | 3 | 1 | 0 | 24 | 4 | 1 | .207 | .298 | .261 | .559 |
'''''굵게'''는 리그 1위; 2019년 기준 통계''
도리타니는 탁월한 선구안을 자랑하며,[120] 2013년에는 양 리그 최저 볼 배합 스윙률을 기록했다.[121] 2013년부터 2017년까지 5년 연속 양 리그 최고 볼 배합 판단율을 기록했다.[122][123][124][125][126]
타구를 넓게 분산시키는 능숙한 배트 컨트롤을 가졌으며,[127][128][129] 특히 좌측 방향으로 타구를 많이 보냈다.[130]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좌타자 상대 타율(.262)이 우타자 상대 타율(.300)보다 낮았지만,[132] 2011년에는 좌투수 상대 타율을 .299까지 끌어올렸다.
현역 시절, 연습 단계에서 볼 배합을 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자신의 스트라이크 존을 확립하여 타격을 익혔다.[133]
2004년 한신 입단부터 2016년 중반까지 유격수, 2016년 중반부터 2018년 초반까지는 주로 2루나 3루, 2018년 중반 이후부터는 다시 유격수를 맡았다. 입단 직후 100m 달리기에서 12초대, 50m 달리기에서 5초 75의 기록을 세웠다.[134]
과거에는 송구의 정확성과 3·유간 타구 대응 능력으로 견고한 수비를 자랑했다.[135][136] 2006년에는 센트럴 리그 시즌 최다 보살 기록(490보살)을 세웠고, 2008년에는 간이 RF 5.13을 기록했다. 2009년 구지 테루요시 코치의 지도 하에 수비율을 향상시켰다.[137] 2010년에는 UZR 11.7(양 리그 2위)을 기록했고,[138] 2011년에는 첫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2012년에는 UZR 10.4(양 리그 4위)를 기록했고,[139] 2013년에는 유격수 UZR 28.9(양 리그 1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2014년에는 UZR -8.1[140], 2015년에는 UZR -20.4를 기록하는 등 수비력이 저하되었다.[143]
2013년에는 WAR에서 아베 신노스케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148] 베스트 나인 6회, 골든 글러브상 5회(유격수 4회, 3루수 1회)를 수상했다.
2004년 9월 6일부터 2018년 5월 27일까지 NPB 역대 2위인 1939경기 연속 출장을 기록했고, 2012년부터 2016년까지는 NPB 역대 4위인 667경기 연속 풀이닝 출장을 기록했다. "'''철인'''"이라고도 불린다.[150]
하지만 잦은 부상을 경험했으며,[151][152] 연속 경기 출장에 대한 동기 부여로 가네모토의 말[155]과 결장으로 인한 포지션 상실에 대한 공포감을 꼽았다.[156]
기누가사 사치오 사망 후,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을 역대 2위인 1939경기로 마감했다.[159]
애칭은 "'''토리'''"이다.[161]
오카다 아키노부는 도리타니를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선수"라고 평가했다.[174]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훈련에 매진하는 것으로 유명하며,[175] 아카호시 노리히로는 도리타니의 연습량을 "양치질과 같다"고 표현했다.[177] 사카모토 하야토,[178] 쿄다 요타[179] 등은 도리타니를 존경한다고 밝혔다.
2017년 5월 24일, 안면 사구에도 불구하고 페이스 가드를 착용한 채 다음 날 연습에 참가하여 가네모토에게 선발 출전을 요청했다.[180] 가네모토는 이를 거절했지만, 도리타니를 대타로 기용했다.[181]
경기 전 루틴으로 소바를 먹는다.[194]
은퇴 후에도 달리기를 습관으로 하고 있다.[183]
야구계에서 멋쟁이로 알려져 있다.[184]
2009년, 페트병 뚜껑(에코 캡)을 모아 소아마비 백신과 교환하는 활동에 참여했다.[185]
2010년, 2011년, 2013년 시즌 후 오사카 시립 대학 부속 병원 소아과를 방문했다.[186]
2011년부터 2018년까지 오키나와현립 남부 의료 센터·어린이 의료 센터를 방문하여 어린이들을 격려했다.[187][188]
2015년 4월, 필리핀 등 가난한 아이들에게 신발을 보내는 활동을 하는 "레드버드" 창설에 참여했다.[189][190] 이 활동으로 HEROs AWARD 2017을 수상했다.[191]
2018년 10월, 서일본 호우 피해 지역인 히로시마현 아키군 사카정의 가설 주택을 방문했다.[192]
한신 타이거스는 도리타니의 사회 공헌 활동을 높이 평가하여 2015년 와카바야시 타다시상을 수여했다.[193]
연도 | 연령 | 리그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도루 | 출루율 | 사구 |
---|---|---|---|---|---|---|---|---|---|---|---|
2004 | 23 | 센트럴 리그 | - | - | - | - | - | - | - | - | - |
2005 | 24 | - | - | 9위 | - | - | - | - | - | - | |
2006 | 25 | - | - | 9위 | - | - | - | - | - | 9위 | |
2007 | 26 | - | 10위 | - | 3위 | - | - | - | - | 8위 | |
2008 | 27 | - | - | - | 3위 | - | 7위 | - | - | 4위 | |
2009 | 28 | - | - | 7위 | - | - | - | - | 8위 | 6위 | |
2010 | 29 | - | 6위 | 9위 | 3위 | - | 4위 | - | - | 4위 | |
2011 | 30 | 4위 | 7위 | 2위 | 1위 | - | - | 6위 | 1위 | 1위 | |
2012 | 31 | - | 9위 | - | 2위 | - | 10위 | 9위 | 5위 | 1위 | |
2013 | 32 | 9위 | 5위 | 3위 | 2위 | - | 9위 | 8위 | 4위 | 1위 | |
2014 | 33 | 7위 | 7위 | - | 10위 | - | 9위 | - | 3위 | 2위 | |
2015 | 34 | 7위 | 4위 | - | 4위 | - | - | - | 4위 | 2위 | |
2016 | 35 | - | - | - | - | - | - | 8위 | - | 6위 | |
2017 | 36 | 8위 | - | - | 8위 | - | - | - | 4위 | 5위 | |
2018 | 37 | - | - | - | - | - | - | - | - | - | |
2019 | 38 | - | - | - | - | - | - | - | - | - |
- '''굵은 글씨 연도'''는 규정 타석 달성 연도
- -는 10위 미만 (타율, 출루율은 규정 타석 미달의 경우에도 -로 표기)
연 도 | 구 단 | 1루 | 2루 | 3루 | 유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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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합 | 자 살 | 보 살 | 실 책 | 병 살 | 수 비 율 | 시 합 | 자 살 | 보 살 | 실 책 | 병 살 | 수 비 율 | 시 합 | 자 살 | 보 살 | 실 책 | 병 살 | 수 비 율 | 시 합 | 자 살 | 보 살 | 실 책 | 병 살 | 수 비 율 | ||
2004 | 한신 | - | - | 30 | 13 | 34 | 0 | 1 | 1.000 | 52 | 69 | 101 | 4 | 16 | .977 | ||||||||||
2005 | - | - | - | 146 | 201 | 477 | 10 | 86 | .985 | ||||||||||||||||
2006 | - | - | - | 146 | 213 | 490 | 21 | 100 | .971 | ||||||||||||||||
2007 | - | - | - | 144 | 196 | 446 | 11 | 81 | .983 | ||||||||||||||||
2008 | - | - | - | 144 | 263 | 476 | 15 | 107 | .980 | ||||||||||||||||
2009 | - | - | - | 144 | 204 | 467 | 7 | 80 | .990 | ||||||||||||||||
2010 | - | - | - | 140 | 205 | 443 | 7 | 98 | .989 | ||||||||||||||||
2011 | - | - | - | 136 | 192 | 389 | 5 | 66 | .991 | ||||||||||||||||
2012 | - | - | - | 144 | 215 | 468 | 12 | 77 | .983 | ||||||||||||||||
2013 | - | - | - | 144 | 213 | 476 | 4 | 98 | .994 | ||||||||||||||||
2014 | - | - | - | 144 | 208 | 363 | 5 | 77 | .991 |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를 나타낸다.
3. 1. 한신 타이거스 시절 (2004~2019)
2004년, 도리타니는 시즌 개막전에서 한신 타이거스의 주전 유격수이자 7번 타자로 선발되었다. 4월 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개막전 8회에 좌완 투수 마에다 유키나가로부터 생애 첫 안타를 기록했다.[7] 그러나 공을 꾸준히 맞히는 데 어려움을 겪어 시즌 여섯 번째 경기에서 후지모토 아쓰시로 교체되었고, 후지모토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출전하기 위해 팀을 떠날 때까지 3루수로 주로 출전했다. 5월 27일에는 당시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우투수 아즈마 카즈마사를 상대로 생애 첫 홈런을, 7월 19일 베이스타스를 상대로 생애 첫 도루를 기록했다.[7] 235 타수에서 타율 0.251, 3홈런, 17타점을 기록했다.2005년, 후지모토는 2루수로 이동했고, 도리타니는 팀의 2번 타자가 되었다. 146경기 모두 출전하여 타율 0.278, 9홈런, 52타점을 기록했으며, 리그 우승에 기여하며 2개의 끝내기 홈런을 치기도 했다.[8][9][10] 비시즌인 12월 20일, 그는 한 살 위였고 야구팀의 팀 매니저였던 고등학교 동창과 결혼했다.[11]
2006년, 타율 0.289, 15홈런, 58타점을 기록했다. 6월 1일부터 3일까지의 한 경기에서, 그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의 첫 경기에서 팀에 리드를 안겨주는 2점 홈런, 두 번째 경기에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에이스 사이토 가즈미를 상대로 솔로 홈런과 1타점 2루타, 세 번째 경기에서 호크스 우완 투수 후지오카 요시아키를 상대로 끝내기 안타를 쳤다. 그러나 수비 면에서는 어려움을 겪으며 21개의 실책으로 일본 프로 야구 전체에서 1위를 기록했다.[12] 9월에 그의 아내는 첫 아이(아들)를 출산했다.
2007년, 팀의 리드오프 타자로 아카호시 노리히로를 대신했지만, 타율 0.273, 10홈런을 기록했다. 7월 24일 주니치 드래곤스와의 경기에서 340경기 연속 이닝 출전이라는 새로운 NPB 기록을 세웠고, 이 기록을 398까지 연장했다. 9월에는 세 명의 여성을 자신의 호텔 방으로 초대했다고 보도되면서 타이거스 구단은 그의 행동에 대해 경고를 했다.
2008년, 타이거스의 6번 타자가 되어, 1년 대부분 동안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다. 이마오카 마코토가 ''이치군''(일본의 "메이저 리그"에 해당) 레벨로 승격된 후 6번 자리에 복귀했다. 가네모토 토모아키 및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2루수 다나카 겐스케와 함께 한 이닝도 빠지지 않고 144경기에 모두 출전했다. 타율 0.281, 13홈런, 개인 최고 80타점[13][14]으로 마치고, 생애 첫 베스트 나인 상을 수상했다.[15] 9월 13일에 그의 아내는 둘째 아이를 출산했다.
2009년, 새로 임명된 감독 마유미 아키노부에 의해 타이거스의 3번 타자로 지정되어, 4월에 클린업 히터 가네모토 앞에서 타율 0.333, 3홈런, 14타점을 기록하고 리그 선두인 20득점을 올렸다.
201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로 이적할 자유 계약 선수 권리를 행사하고 싶다는 뜻을 타이거스 구단에 알렸지만, 결국 타이거스와 재계약했다.[16]
2019년 12월 2일,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17]
도리타니는 수비 시 훌륭한 수비 범위를 보였다. 유격수 포지션의 일본 프로 야구(NPB) 선수들 중 가장 강한 어깨를 가지고 있어 5-5 구역 (3루와 유격수 사이) 깊숙한 곳에서도 자주 플레이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는 특히 송구 과정에서 다소 실책을 범하는 경향이 있었다.[22] 2008 시즌에 15개의 실책을 기록하여 센트럴 리그 유격수 중 최다 실책 동률을 기록했다.
NPB(Nippon Professional Baseball) | |||||||||||||||||
---|---|---|---|---|---|---|---|---|---|---|---|---|---|---|---|---|---|
연도 | 나이 | 팀 | G | AB | R | H | 2B | 3B | HR | TB | RBI | SB | AVG | OBP | SLG | OPS | |
2004 | 22 | 한신 | 101 | 235 | 28 | 59 | 13 | 0 | 3 | 81 | 17 | 2 | .251 | .320 | .345 | .665 | |
2005 | 23 | 146 | 572 | 82 | 159 | 27 | 1 | 9 | 215 | 52 | 5 | .278 | .343 | .376 | .719 | ||
2006 | 24 | 146 | 543 | 65 | 157 | 28 | 2 | 15 | 234 | 58 | 5 | .289 | .362 | .431 | .793 | ||
2007 | 25 | 144 | 565 | 67 | 154 | 19 | 4 | 10 | 211 | 43 | 7 | .273 | .350 | .373 | .724 | ||
2008 | 26 | 144 | 523 | 66 | 147 | 17 | 6 | 13 | 215 | 80 | 4 | .281 | .365 | .411 | .776 | ||
2009 | 27 | 144 | 538 | 84 | 155 | 31 | 2 | 20 | 250 | 75 | 7 | .288 | .368 | .465 | .819 | ||
2010 | 28 | 144 | 575 | 98 | 173 | 31 | 6 | 19 | 273 | 104 | 13 | .301 | .373 | .475 | .848 | ||
2011 | 29 | 144 | 500 | 71 | 150 | 28 | 7 | 5 | 207 | 51 | 16 | .300 | .395 | .414 | .809 | ||
2012 | 30 | 144 | 515 | 62 | 135 | 22 | 6 | 8 | 193 | 59 | 15 | .262 | .373 | .375 | .748 | ||
2013 | 31 | 144 | 532 | 74 | 150 | 30 | 4 | 10 | 218 | 65 | 15 | .282 | .402 | .410 | .812 | ||
2014 | 32 | 144 | 550 | 96 | 172 | 28 | 2 | 8 | 228 | 73 | 10 | .313 | .406 | .415 | .820 | ||
2015 | 33 | 143 | 551 | 69 | 155 | 21 | 4 | 6 | 202 | 42 | 9 | .281 | .380 | .367 | .747 | ||
2016 | 34 | 143 | 449 | 49 | 106 | 16 | 1 | 7 | 145 | 36 | 13 | .236 | .344 | .323 | .667 | ||
2017 | 35 | 143 | 488 | 57 | 143 | 23 | 3 | 4 | 184 | 41 | 8 | .293 | .390 | .377 | .767 | ||
2018 | 36 | 121 | 220 | 15 | 51 | 11 | 0 | 1 | 65 | 22 | 1 | .232 | .333 | .295 | .629 | ||
2019 | 37 | 74 | 92 | 9 | 19 | 3 | 1 | 0 | 24 | 4 | 1 | .207 | .298 | .261 | .559 |
'''''굵게'''는 리그 1위; 2019년 기준 통계''
탁월한 선구안을 자랑한다.[120] 2013년에는 양 리그 최저의 볼 배합 스윙률을 기록하는 동시에[121], 구단 기록인 104사구를 달성했다. 2013년부터 2017년까지 5년 연속 양 리그 최고 볼 배합 판단율 (규정 타석 도달자 중)을 기록했다.[122][123][124][125][126]
타구를 넓게 분산시키는 능숙한 배트 컨트롤의 소유자이기도 하며[127][128][129], 특히 좌측 방향으로의 타구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130]
2006년부터 2010년까지의 통산 우타자 상대 타율 .300에 비해 좌타자 상대 타율 .262로 좌투수를 어려워했으며, 특히 좌투수의 떨어지는 공을 어려워했다.[132] 하지만 2011년에는 좌투수 상대 타율을 .299까지 끌어올려 좌투수의 약점을 극복했다.
현역 시절 무기 중 하나였던 타격은 연습 단계에서 볼 배합을 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자신의 스트라이크 존을 확립하여 익혔다.[133]
2004년 한신 입단부터 2016년 중반까지 유격수, 2016년 중반부터 2018년 초반까지는 주로 2루나 3루, 2018년 중반 이후부터는 다시 유격수를 맡고 있다. 입단 직후 신인 합동 자율 훈련에서는 100m 달리기에서 12초대, 50m 달리기에서 5초 75의 기록을 세웠다.[134]
과거에는 송구의 정확성과 3·유간 타구 대응 능력의 높이를 무기로 견고한 수비의 유격수로서 활약했다.[135][136] 2006년에는 490보살로 센트럴 리그 시즌 최다 보살 기록, 2008년에는 리그 16년 만에 5점대인 간이 RF 5.13을 기록했다. 2009년 시즌부터 수비 코치로 취임한 구지 테루요시의 지도 하에 수비율을 향상시키는 등 더욱 안정감이 더해졌다.[137] 2010년에는 양 리그 2위인 UZR 11.7을 기록했고,[138] 2011년에는 본인 첫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2012년에도 수비 이닝 1,000 이상인 유격수 중 양 리그 4위의 UZR 10.4를 기록했고,[139] 2013년에는 DELTA사가 산출한 UZR에서 유격수 양 리그 1위인 28.9를 기록했다.
그러나 2014년은 DELTA사가 산출한 UZR은 유격수로서 -8.1[140], 데이터 스타디움사가 산출한 UZR은 400이닝 이상 출장한 유격수로서 리그 최악 2위의 UZR -5.3을 기록했다.[141] 2015년에는 수비에서 발목을 잡는 플레이가 종종 보이기 시작하여[142], UZR에서는 최종적으로 -20.4를 기록했다(유격수로서의 수치).[143]
2013년에는 야구 선수의 종합 평가 지표 WAR에서 아베 신노스케에 이은 2위를 기록했다.[148] 베스트 나인을 6회, 골든 글러브상을 5회 (유격수로서 4회, 3루수로서 1회) 수상했다.
2004년 9월 6일 야쿠르트전부터 2018년 5월 27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모두 고시엔 구장에서 대타로 기용)까지 NPB 역대 2위의 공식전 1939경기 연속 출장을 기록했다. 그 사이 2012년부터 2016년까지 NPB 역대 4위(유격수로는 역대 1위)인 667경기 연속 풀이닝 출장을 기록했다. "'''철인'''"이라고도 불린다.[150]
하지만 실제로는 요추, 늑골, 척추, 코뼈 골절 등 다수의 부상을 경험했다.[151][152]
도리타니 본인은 연속 경기 출장에 대한 동기 부여로 "그날밖에 올 수 없는 팬도 있으니 계속 출전한다"는 가네모토의 말[155]과 결장으로 포지션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공포감을 꼽았으며[156], 또한 "연속 경기 출전 자체가 야구에 대한 동기 부여가 된다"라고도 말했다.[157]
기누가사 사치오가 2018년 4월 22일 71세의 나이로 사망한 직후에는 "기록을 의식한 적은 없지만, 매년 캠프 등에서 말을 걸어 주신 일이나 인사를 나눌 때 이야기를 해 주신 적은 있다"라는 코멘트를 남겼다.[158] 하지만 약 한 달 후(5월 29일) 소프트뱅크전 출전을 보류함으로써 자신의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을 역대 2위인 1939경기로 마감했다.[159]
애칭은 "'''토리'''"[161]이다.
와세다의 선배이자, 도리타니의 한신 입단 시부터 5년간 감독으로 지낸 오카다 아키노부는 "팀 리더 타입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는 선수"라고 평했다. 같은 대학 4학년 때도 캡틴 취임을 거절했다고 한다.[174]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훈련에 매진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며[175], 최신 이론을 반영하면서 훈련을 계속하고 있다.[176] 아카호시 노리히로가 연습량을 묻자, "연습은 양치질과 같이 매일 계속하는 것으로, 연습하지 않으면 기분이 나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177] 사카모토 하야토[178], 쿄다 요타[179] 등은 도리타니에 대한 존경을 공언하고 있다.
한신 3년 차인 2006년 4월부터 타율 3할 달성을 목표로 내걸고, 프로 야구 시즌 중에 '닛칸 스포츠'(오사카 본사 발행판)에서 "로드 to 3할"이라는 모놀로그 형식의 칼럼을 한 달에 한 번씩 독점 연재했다. 자신의 타격에 대해 월별로 해설하는 기획으로, 2010년 시즌에 처음으로 3할을 달성하고 나서도 제목을 '3번 길', '향상심'으로 바꾸면서 이어지고 있다.
2017년 5월 24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안면에 사구를 맞았지만, 코와 광대뼈를 검은색 페이스 가드로 덮은 채 25일 경기 전 연습에 참가했다. 게다가, 가네모토에게 선발 출전을 직소했다. 가네모토는 도리타니의 코가 골절의 영향으로 크게 부어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도리타니의 직소를 형식상 거절한 후[180] 결국, 같은 날 요미우리전과 다음 날인 26일 DeNA전(고시엔)에는 도리타니에게 페이스 가드를 착용시킨 채 대타로 기용했다.[181]
경기 전 루틴에 소바를 먹는다.[194]
자신의 현역 시절 80승 해도 60패는 한 경험에서 연패한 팀을 함부로 험담하지 않는 배려를 보이고 있다.[182]
은퇴 후에도 이틀에 한 번씩 달리기를 습관으로 하고 있다.[183]
야구계에서도 멋쟁이라고도 한다.[184]
2009년에 팀 전체가 참여한 페트병 음료 뚜껑(에코 캡) 800개를 모아 소아마비 백신 1개와 교환하는 복지 활동의 일환으로, 도리타니가 직접 에코 캡 수천 개를 가져와 아시야시 내 유치원에 기부했다.[185]
2010년, 2011년, 2013년 시즌 종료 후 오사카 시립 대학 부속 병원의 소아과를 위문했으며, 그 이후의 방문에도 의욕을 보이고 있다.[186]
2011년부터 2018년까지 8년 연속 총 10회에 걸쳐 오키나와현립 남부 의료 센터·어린이 의료 센터를 방문하여 입원 생활을 하는 어린이들을 격려하고 있다.[187][188]
2015년 4월에는 필리핀 등 가난한 아이들에게 신발을 보내는 활동을 하는 일반 사단법인 "레드버드"의 창설에 관여했다. 2014년 12월에 야구 교실을 열기 위해 글러브 100개를 가지고 마닐라를 방문했을 때,[189][190] 현지 아이들 중 많은 수가 맨발인 것을 보고 "필요한 것은 글러브가 아니라 신발이다"라고 느낀 것이 계기였다. 본인도 "레드버드"에 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이 활동으로, 사회를 위해 스포츠맨십을 발휘한 선수나 팀을 표창하고, 운동선수의 사회 공헌 활동을 촉진하는 어워드인 HEROs AWARD 2017을 수상했다.[191]
2018년 10월에는 서일본 호우 재해의 피해 지역인 히로시마현 아키군 사카정의 가설 주택을 방문하여 피난 생활을 하는 피해자들과 교류를 가졌다.[192]
한신 구단도 이상의 활동을 높이 평가했다. 2015년에는 구단으로부터 제5회 와카바야시 타다시상을 수여받았다.[193]
연도 | 연령 | 리그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도루 | 출루율 | 사구 |
---|---|---|---|---|---|---|---|---|---|---|---|
2004 | 23 | 센트럴 리그 | - | - | - | - | - | - | - | - | - |
2005 | 24 | - | - | 9위 | - | - | - | - | - | - | |
2006 | 25 | - | - | 9위 | - | - | - | - | - | 9위 | |
2007 | 26 | - | 10위 | - | 3위 | - | - | - | - | 8위 | |
2008 | 27 | - | - | - | 3위 | - | 7위 | - | - | 4위 | |
2009 | 28 | - | - | 7위 | - | - | - | - | 8위 | 6위 | |
2010 | 29 | - | 6위 | 9위 | 3위 | - | 4위 | - | - | 4위 | |
2011 | 30 | 4위 | 7위 | 2위 | 1위 | - | - | 6위 | 1위 | 1위 | |
2012 | 31 | - | 9위 | - | 2위 | - | 10위 | 9위 | 5위 | 1위 | |
2013 | 32 | 9위 | 5위 | 3위 | 2위 | - | 9위 | 8위 | 4위 | 1위 | |
2014 | 33 | 7위 | 7위 | - | 10위 | - | 9위 | - | 3위 | 2위 | |
2015 | 34 | 7위 | 4위 | - | 4위 | - | - | - | 4위 | 2위 | |
2016 | 35 | - | - | - | - | - | - | 8위 | - | 6위 | |
2017 | 36 | 8위 | - | - | 8위 | - | - | - | 4위 | 5위 | |
2018 | 37 | - | - | - | - | - | - | - | - | - | |
2019 | 38 | - | - | - | - | - | - | - | - | - |
- '''굵은 글씨 연도'''는 규정 타석 달성 연도
- -는 10위 미만 (타율, 출루율은 규정 타석 미달의 경우에도 -로 표기)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right; font-size:small; border-collapse:collapse; padding:1px;"
!rowspan="2"|연
도!!rowspan="2"|구
단!!colspan="6"|1루!!colspan="6"|2루!!colspan="6"|3루!!colspan="6"|유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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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병
살!!수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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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2004
|rowspan="16" style="text-align:center; white-space:nowrap;"|한신
|colspan="6" style="text-align:center;"|-||colspan="6" style="text-align:center;"|-||30||13||34||0||1||1.000||52||69||101||4||16||.977
|-
|style="text-align:center;"|2005
|colspan="6" style="text-align:center;"|-||colspan="6" style="text-align:center;"|-||colspan="6" style="text-align:center;"|-||'''146'''||201||477||10||86||.985
|-
|style="text-align:center;"|2006
|colspan="6" style="text-align:center;"|-||colspan="6" style="text-align:center;"|-||colspan="6" style="text-align:center;"|-||'''146'''||213||'''490'''||'''21'''||'''100'''||.971
|-
|style="text-align:center;"|2007
|colspan="6" style="text-align:center;"|-||colspan="6" style="text-align:center;"|-||colspan="6" style="text-align:center;"|-||'''144'''||196||446||11||81||.983
|-
|style="text-align:center;"|2008
|colspan="6" style="text-align:center;"|-||colspan="6" style="text-align:center;"|-||colspan="6" style="text-align:center;"|-||'''144'''||'''263'''||'''476'''||'''15'''||'''107'''||.980
|-
|style="text-align:center;"|2009
|colspan="6" style="text-align:center;"|-||colspan="6" style="text-align:center;"|-||colspan="6" style="text-align:center;"|-||'''144'''||204||467||7||80||'''.990'''
|-
|style="text-align:center;"|2010
|colspan="6" style="text-align:center;"|-||colspan="6" style="text-align:center;"|-||colspan="6" style="text-align:center;"|-||140||205||443||7||'''98'''||.989
|-
|style="text-align:center;"|'''2011'''
|colspan="6" style="text-align:center;"|-||colspan="6" style="text-align:center;"|-||colspan="6" style="text-align:center;"|-||136||192||389||5||66||.991
|-
|style="text-align:center;"|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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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2013'''
|colspan="6" style="text-align:center;"|-||colspan="6" style="text-align:center;"|-||colspan="6" style="text-align:center;"|-||'''144'''||'''213'''||'''476'''||4||'''98'''||'''.994'''
|-
|style="text-align:center;"|'''2014'''
|colspan="6" style="text-align:center;"|-||colspan="6" style="text-align:center;"|-||
3. 1. 1.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후지모토 아쓰시가 일본 국가대표로 발탁되면서 생긴 공백기와, 후지모토가 부진했던 9월 중순부터 시즌 종료까지 도리타니 다카시는 다시 유격수로 선발 출전 기회를 얻었다. 시즌 후반에는 158타수 46안타, 타율 2할 9푼 1리를 기록하며 회복세를 보였다. 프로 1년 차 최종 성적은 타율 2할 5푼 1리, 3홈런, 17타점이었다.[7]신인 도리타니는 후지모토 아쓰시와의 포지션 경쟁 속에 7번·유격수로 개막전에 선발 출장, 4월 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좌완 투수 마에다 유키나가로부터 프로 데뷔 첫 안타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후 5경기 만에 선발에서 제외되었고, 6경기부터는 후지모토에게 유격수 자리를 내주었다.[7] 주로 대타나 3루수로 출전하며 시즌 전반기에는 77타수 13안타, 타율 1할 6푼 9리로 부진했다. 5월 27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우완 투수 아즈마 카즈마사를 상대로 생애 첫 홈런, 7월 19일 베이스타스를 상대로 생애 첫 도루를 기록했다.
3. 1. 2. 2005년
후지모토가 2루수로 전향하면서 개막 이후부터 유격수로 전 경기(146경기)에 출전했다.[18] 2번 타자였던 후지모토와 세키모토 겐타로의 타격 부진으로 교류전 이후에는 2번 타자를 맡았다. 타율 2할 7푼 8리, 9홈런, 52타점의 성적을 남겼고, 끝내기 홈런을 2개나 치는 등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했고, 일본 시리즈에도 나갔다. 4월 27일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는 팀 동료 하시모토 겐타로가 프로 첫 승을 거뒀지만, 위닝볼을 관중석에 던져버렸다. 같은 해 시즌이 끝난 후, 고등학교 1년 선배이자 야구부 매니저였던 여성과 결혼했다.
3. 1. 3. 2006년
시즌 전반기에는 주로 7번 타자, 시즌 후반기에는 6번 타자로 유격수로서 전 경기(146경기)에 모두 출전했다. 6월 1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전에서 아이쿄 히사시로부터 역전 2점 홈런을 때려냈고, 6월 2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전에서는 사이토 가즈미로부터 솔로 홈런과 결정적인 2루타, 6월 3일 소프트뱅크전에서는 후지오카 요시아키로부터 끝내기 안타를 날리는 등 사흘 연속 단상에 올랐다.[117] 팬 투표로 2년 연속 올스타전에 선출되었다.[117] 9월 전반까지 타율 3할대를 유지하였지만 시즌 종반에 성적이 떨어져 최종 성적은 타율 2할 8푼 9리, 15홈런, 58타점을 남겼다.[117]3. 1. 4. 2007년
아카호시 노리히로를 대신하여 주로 1번 타자로 출전했지만 타격 부진으로 인해 타율 2할 7푼 3리, 10홈런, 43타점을 남기는 등 타격 성적이 전년도보다 침체되었다.[204] 7월 24일 주니치전에서 유격수로서는 340경기 연속 출장이라는 프로 야구 기록을 수립했고, 9월 28일에는 398경기까지 기록을 늘렸지만 며칠 전에 받은 사구의 영향으로 다음 날인 9월 29일에 경기 도중 교체되었다.[204] 같은 해 9월 도쿄 원정 기간 중 3명의 여성이 팀 숙소의 도리타니가 있는 방에 머물렀던 것이 발각되어 사진 주간지 ‘FLASH’에 의해 폭로되는 등 도리타니 본인도 사실 관계를 인정하면서 구단으로부터 엄중 주의 처분을 받았다.[204] 같은 해 시즌 종료 후 라식 수술을 받아 시력이 회복되었다.[204]3. 1. 5. 2008년
개막 이후 6번 타자 겸 유격수로 출전했고, 시즌 전반기에는 3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하며 좋은 모습을 보였다. 여름에는 아라이 다카히로가 전력에서 이탈했을 때 3번이나 5번 타자로 뛰기도 했지만, 컨디션이 떨어졌다. 타격 부진에 시달렸던 이마오카 마코토가 9월에 복귀한 이후에는 다시 6번 타자로 돌아와 타율 2할 8푼 1리, 13홈런, 개인 최다인 80타점을 기록했다. 10월 19일 클라이맥스 시리즈 주니치전에서는 1경기 2홈런을 기록했다. 수비에서는 센트럴 리그에서 가장 높은 수비 지표를 기록했지만, 골든 글러브상을 받지 못해 논란이 일었다.[205] 같은 해, 개인 통산 두 번째로 전 경기(144경기) 풀 이닝 출전을 기록하며 베스트 나인을 처음으로 수상했고, 9월 13일에는 차남이 태어났다.3. 1. 6. 2009년
시즌 개막 이후부터 3번·유격수로서 출전했고 4월 종료 시점을 기준으로 90타수 30안타와 14타점을 남기면서 양호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5월에는 타격 부진으로 인해 타순에서도 7번으로 떨어지게 되었고 주로 대타로서 출전을 하는 등 불안한 시즌을 보냈다.[117] 시즌 후반기에는 점차 회복되면서 타순도 3번으로 되돌아와 타율 2할 8푼 8리, 자신의 첫 20홈런을 달성한 것과 75타점을 기록했고 안타, 득점, 타율, 장타율, OPS는 모두 팀내 1위의 성적이다.[117] 수비면에서는 유격수로서 리그 1위의 수비율인 9할 9푼을 기록했다.[117] 이것은 히라타 가쓰오가 1986년에 기록한 9할 8푼 8리를 웃도는 구단 기록이었다.[117] 11월 26일, 현역에서 은퇴한 아카호시 노리히로의 후임으로서 한신 타이거스의 선수 회장으로 취임했다.[117]3. 1. 7. 2010년
5월에는 맷 머턴과 충돌하여 허리뼈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어 4경기 만에 선발에서 제외되었다.[206] 6월부터 7월까지는 1번 타자로 뛰었고, 8월에 다시 3번 타자로 복귀한 후에는 컨디션을 회복하여 아카호시 노리히로가 보유했던 구단 월간 최다 안타 기록(43개)을 경신하며 월간 타율 4할 2푼 2리를 기록, 처음으로 월간 MVP를 수상했다.10월 2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는 유격수로서는 프로 야구 사상 최초로 시즌 100타점을 달성했고,[206] 10월 5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는 개인 통산 1,000안타를 달성했다. 시즌 타율 3할 1리, 19홈런, 104타점을 기록하며 개인 최고 성적을 올렸고, 리그 1위인 득점권 타율 3할 6푼과 5할 대의 만루 타율을 기록했다. 7월 20일 히로시마전에서는 구단 역사상 최초로 ‘연장전 역전 끝내기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 해, 2008년 이후 2년 만에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고, 6월 4일에는 한신 선수 회장으로서 총무성 긴키 종합 통신국으로부터 ‘지데지카 응원대’(地デジカ応援隊일본어)의 타이거스대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7월 2일에는 장녀가 태어났다.
3. 1. 8. 2011년
그 해에 새로 도입된 공인구(일명 통일구)의 영향으로 홈런과 타점은 전년도보다 절반 이하로 떨어졌지만, 타율은 리그 4위(.300)를 기록해 2년 연속 3할 대의 타율을 기록했다.[117] 3루타 7개, 볼넷 78개, 출루율 3할 9푼 5리는 모두 리그 1위를 차지해 본인으로서는 첫 타이틀인 최고 출루율을 차지했다.[117] 부상으로 수비를 할 수 없었던 시기도 있었지만, 3년 연속으로 한 자릿수대 실책을 기록했고 수비율도 유격수로서는 리그 2위(.991)를 기록하여, 자신이 기록한 구단 기록을 경신했다.[117] 9월 3일에는 국내 FA권을 취득했다.[117]2011년 기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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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율 | .300 (리그 4위) |
3루타 | 7개 (리그 1위) |
볼넷 | 78개 (리그 1위) |
출루율 | .395 (리그 1위) |
수비율 | .991 (유격수 리그 2위) |
3. 1. 9. 2012년
鳥谷 敬|도리타니 다카시일본어는 2012년에 한신 타이거스의 야수 캡틴으로 선출되었다.[117] 2010년과 2011년에는 선수 회장을 맡았다.연도 | 연령 | 리그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도루 | 출루율 | 사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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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 31 | 센트럴 리그 | - | 9위 | - | 2위 | - | 10위 | 9위 | 5위 | 1위 |
- '''굵은 글씨 연도'''는 규정 타석 달성 연도
- -는 10위 미만 (타율, 출루율은 규정 타석 미달의 경우에도 -로 표기)
2012년 출연한 주요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 프로 야구 올스타 스포츠 페스티벌(니혼 텔레비전) 계:2012년 1월 8일
- 오하요 아사히입니다(아사히 방송 텔레비전) 계:2012년 2월 10일 (하마나카 오사무, 세키모토 겐타로와 공동 출연·대담)
- 열혈!! 타이거스 당(선 텔레비전) 계:2012년 12월 07일
2012년에는 후지카와 큐지, 아라이 타카히로와 함께 조신 덴키의 CM에 출연했다.
3. 1. 10. 2013년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일본 국가대표로 출전했으며, 정규 시즌에서는 팀 캡틴으로 선출되었다.[117]연 도 | 대 표 | 경 기 | 타 석 | 타 수 | 득 점 | 안 타 | 2 루 타 | 3 루 타 | 홈 런 타 | 루 타 | 타 점 | 도 루 | 도 루 실패 | 희 타 | 희 플 | 볼 넷 | 고 의 사 구 | 사 구 | 삼 진 | 병 살 타 | 타 율 | 출 루 율 | 장 타 율 | O P 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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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 일본 | 7 | 22 | 15 | 4 | 4 | 1 | 1 | 1 | 13 | 2 | 1 | 0 | 2 | 1 | 4 | 0 | 0 | 2 | 0 | .267 | .400 | .667 | 1.067 |
- WBC 3연패를 향한 일본의 긍지(TBS) (2013년 3월 7일)
- 카와스포(마이니치 방송) (2013년 3월 30일): 카와타 나오야 아나운서와 대담
- 선데이 스포츠 (NHK 종합 텔레비전) (2013년 4월 7일): "아니키의 방"에 출연, 카네모토 토모아키와 대담
- 호랑이 뱅(아사히 방송) (2013년 12월 1일)
- 오하요 아사히입니다(아사히 방송) (2013년 12월 20일): 스페셜 게스트로 생방송 출연
- THE GOLDEN BATTLE 2013 절대 있을 수 없는 궁극의 스페셜 매치(후지 텔레비전) (2013년 12월 24일): "프로 야구 VS 소프트볼 우에노"에 출연, 우에노 유키코를 상대로 프로그램 사상 첫 멀티 안타를 기록했지만 패배. 나카타 쇼, 이토이 요시오와 공동 출연
3. 1. 11. 2014년
합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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